기억의 빈자리 : Blanks in Memory



전시소개



본화랑은 2월 28일부터 3월 22일까지 종이 위에 연필과 수묵 기법으로 작업하는 이혜진 작가의 개인전 <기억의 빈자리>를 개최한다. 이혜진은 2022년 화랑미술제의 ZOOM-IN 대상 작가로 선정된 이력이 있으며 개인전 및 단체전을 통해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시간, 공간, 그리고 기억에 관한 주제로 일상 공간을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으로 풀어낸 이혜진 작가의 작품 11점이 본화랑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시간은 편파적으로 경험된다. 어떤 시간은 영속적으로 어떤 시간은 찰나의 순간으로 기억된다. 시간의 객관적 실재성과는 별개로 인간의 의식을 통해 인지되는 시간은 개인의 사건과 기억에 따라 선명해지거나 흐릿해지기도 하며 확장되거나 머물러 있기도 한다. 이처럼 시간에 의해 경험되는 의미와 감각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심리적이다. 한편, 시간을 감각하고 체험하는 장소로서 공간은 실존적이고 구체적이다. 공간은 시간과 흐름을 같이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적 범주에서 사물과 세계를 감각하고 사유하며 시간과 공간과의 관계를 다차원적으로 형성함으로써 존재의 본질을 인식한다.



이혜진은 시공간과의 상호작용에 의한 자신의 감정, 관념 등의 내면세계를 회화적 기록을 통해 드러낸다. 특히 일상적 공간에 주목하고 그곳에서 느낀 강렬한 순간의 인상을 그리며 작가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수많은 순간과 감정이 얽힌 하나의 공간은 다양한 시제의 중첩을 통해 새롭게 건축된다. 시간의 간극으로부터 발생한 감정과 기억의 변화는 공간적 요소들과의 결합과 편집을 통해 주관적 차원의 풍경으로 재구성된다. 창조된 공간은 실존 공간이자 상상적 공간이며, 익숙함과 동시에 생경함을 동반한다. 작가는 일상 공간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공간과 자신의 개인적 관계에서 오는 심리적, 정서적 풍경을 그려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작품은 일상의 보편적 장소를 배경으로 하나 개별성이 담긴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이 된다.



기억은 가변적이며 취약하다. 작가는 휘발되는 기억을 공간에 새긴다. 갈수록 희미해지거나 혹은 더 강렬해지는 기억의 잔상은 먹과 연필 선의 명암과 농도의 차이로 풀어낸다. 정제된 흑백의 풍경은 작가가 느낀 그날의 기분, 감정, 공간적 분위기 등의 혼재된 감상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는데, 선을 쌓아가고 걷어내는 반복적 행위로 기록된 기억의 잔상은 원래의 공간에 새로운 인상을 부여한다. 무수히 겹친 선들이 만들어낸 파장은 공간적 흔들림과 움직임을 만들며 옅어지면서 짙어지는 오묘한 시공간적 흐름을 만든다. 작가는 시공간의 변화와 그에 따른 기억의 가변성을 섬세하면서 역동적으로 표현한다.



인적이 없는 고요한 풍경에는 인간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외로움과 고독함의 정서가 느껴진다. 작가의 정서와 상념이 가득한 아득한 광경에는 지나간 시간과 변해가는 장소에 대한 쓸쓸함과 아쉬움이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그곳에는 사라져가는 순간을 붙잡아두고자 하는 작가의 강한 열망과 떠나간 것을 향한 느긋한 태도가 뒤섞여있다. 그러나 이혜진은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을 요동치듯이 격렬하게 표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흘러간 것은 흘러간 대로 관조하며 심플하고 담담한 어조로 일관한다. 내면세계가 함축된 무채색의 담백한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만의 사적인 시간, 공간, 그리고 기억을 회상하게 하며, 떠오른 상념들에 대한 억지스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위안과 편안함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