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biguous Boundaries
전시소개
자연관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의미와 양상으로 변해왔다. 채집과 수렵 생활을 하던 원시 시대에 자연은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존재로서, 신성하고 불가사의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농업 혁명 이후 자연은 생존을 넘어 이용 가능한 자원으로 인식되었으며, 과학 혁명과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자연은 이제 분석 가능하고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자연은 더 이상 단순한 생존의 장이나 정복해야될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정재원은 오늘날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자연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탐구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이전 어느 시대보다도 자연을 욕망한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등장하는 판타지적이고 드라마틱한 자연 이미지, 4K TV 스크린에서 선명하게 펼쳐지는 화려한 자연 풍경은 현대인들이 욕망하는 자연의 모습이다. 또한, 공원, 수목원, 캠핑과 같은 활동을 통해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자연을 만끽하고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현재 우리들이 상상하고 소비하는 자연은 본래의 거칠고 원초적인 자연과는 달리 대부분 가공된 이미지나 관리된 환경이다. 이러한 자연은 연출된 허구적 자연으로, 결국 우리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조정된 이상적인 공간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이 더 이상 단일한 의미로 정의되지 않는 오늘날의 환경에서 정재원은 설명하기 어려운 자연에 대해 꾸준히 고찰해왔다. 그는 이상적으로 왜곡된 형태의 자연과 실제 자연 사이의 괴리 속에서 혼재하는 지점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그 모호한 경계를 회화를 통해 다층적으로 드러내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경계가 사라진 불분명한 세계에서 혼종식물이 피어난다. 정재원은 상이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혼종'을 회화의 메커니즘으로 삼아 자연을 복합적인 관점으로 접근한다. 작가는 과거 서적부터 구글에서 수집한 이미지들을 복제하고 해체하며, 이를 병치시키는 재조합의 과정을 통해 혼종적인 풍경을 창조한다. 서로 다른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결합된 이미지는 다층적인 의미를 담은 새로운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그 안에는 수많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과 욕망이 뒤엉킨 함축적 풍경이 존재한다. 대칭과 비대칭, 규칙과 변칙, 익숙하면서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요소들이 모순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풍경은 자연과 인공, 실제와 가상,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세계를 표현한다.
이번 개인전에서 정재원은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방식의 식물 풍경을 선보인다. 먼저, 식물도감처럼 보이는 식물 시리즈에서는 여러 종의 혼합된 식물들이 등장하는데, 화려하면서도 기이하고, 날렵하면서도 유기적인,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형태의 혼종 식물들이 그려진다. 이 불가사의하고 기묘한 형상들은 언뜻 산호초 같기도 하고, 곤충같기도 하며, 신체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혼종 식물을 통해 자연의 단일한 정체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탄생과 변신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자연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해 끊임없이 다른 형태와 의미를 창조해내는 역동적인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식물 초상화에서 확장된 식물 풍경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대칭 구조를 지닌 식물과 이국적인 장치들이 조화를 이루는 상상력 넘치는 공간이다. 신비로운 분위기로 연출된 실제와 허구가 뒤섞인 공간은 다른 차원의 풍경으로 우리를 이끈다. 다양한 요소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된 풍경은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가상적인 공간으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시각적 탐험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는 드넓게 펼쳐진 울창한 밀림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공간의 축적이 담긴 풍경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사유된다. 태곳적 신비와 미지의 풍광이 교차하는 현재의 장면에서는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의 식별이 불가능하다. 종말과 생성, 소멸과 재생이 끝없이 이어지는 순환 속에서 모든 법칙과 경계는 사라지고, 모든 것은 상호 연결된 존재로 드러난다. 시공간의 개념이 사라진 이 장소에는 자연의 강한 자생력과 순수한 야생성만이 남아 있다. 그 어떤 개입이나 방해도 받지 않는 이 초월적인 공간은 원초적이며 진정으로 자유롭다. 정재원은 현실과 환상이 뒤엉킨 시공간의 확장을 통해 아득하고 신비로운 독창적인 풍경을 펼쳐내보인다.